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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타지] 여신의 산책

 

 

 

 

깜빡 졸았던 걸까? 잠에 겨워 고개가 숙여지다 흠칫 놀라 일어났다.

‘새벽 2시..’

발아래로는 읽다가 잠이든 소설책이 떨어져 있고 열려진 창문으로
제법 싸늘한 바람이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산불감시원>.. 현재 나의 일이다.

가을로 접어들고 대기가 점점 물기를 잃어가면 강원도 깊은 산
이름모를 높은 봉우리에 세워진 산불감시탑에 공익근무요원들이 돌아가며 근무를 선다.
몇 가구 되지도 않은 작은 리 에서 무려 두 시간 가까이 산을 올라야 감시초소가 있기에
이곳에서 밤을 보내는 날엔 간식거리나 읽을 책, 부탄가스. 물, 캠핑용 램프 등
제법 한보따리정도를 둘러메고 헉헉거리며 산을 올라야 했다.

감시탑은 어두운 산맥 높은 봉우리위에 있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불빛하나 없고 그저 바람에 스치는 나무들 소리나
이따금씩 길게 울고 가는 새소리 뿐, 너무나 조용해서 귓속에서 위잉..거리며 울리는 소리가
들릴 지경이었다.

처음 이곳에 올라오던 날 마을 이장님께 인사를 드리자 심술궂은 웃음을 지으며
놀리듯 말하던 얘기가 떠올랐다.

“젊은양반 가는 길은 아나? 고생하러 가는구먼...보자..첨 온 것 같은데..허허..
이보게 밤에 여자조심하게...허허..거기 귀신 나와 이 사람아.. 허허..”

이런..안그래도 산속에서 혼자 있을 내게 대뜸 귀신 얘기라니..
그래도 사람 좋아뵈는 웃음을 지으며 밤에 먹으라고 컵라면에 소주 한 병을 넣어주셨었지..

문득 그 얘기를 듣고 처음 올라온 날 밤새 무서워서 소주 한 병을 물처럼 마셔버리곤
쭈뼛거리며 새벽을 기다리던 일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나왔다.

‘ 귀신이라...’

잔에 소주를 따르며 망루 밖을 바라봤다.
제법 서늘한 날씨에 보름달인지 깨질 듯 아름다운 달빛이 온 산에 내려앉고 있었고..
달빛이 너무 아름다워 담배를 피워 문 후 램프를 꺼버렸다.

순간
망루 안으로 물밀 듯이 밀려들어오는 달빛..
부드럽고, 어쩌면 애타게, 넘실대듯
어떤 형용사로 이 순간을 표현해야 할까...?
창가에 기대어 담배 한 모금을 깊게 들이마시고 달빛이 춤추는 우주로
연기를 날려 보냈다.

그때였다.

날카롭게 날이 선 고요속에 새근대는 듯하기도 하고 불규칙한 숨소리 같은
낯선 음향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간건..
그 소리는 갑자기 허공을 가로지르며 날아가는 밤새의 소리도 아니었고
산짐승의 소리도 아니었다.
그건 분명 사람의 소리였다.
망루 아래 어딘가 풀잎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에 억눌린 듯한 숨소리가
점점 커다랗게 귓속으로 울려왔고 달빛 속에 알 수 없는 공포가 번져가기 시작했다.

‘ 뭘까...? ’

무서움과 격렬한 호기심이 뒤섞인 체 망루 창밖으로 얼굴을 내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비명처럼 소리쳤다.

“ 누구냐? ”

고요를 깨고 번져간 내 외침과 동시에 그 소음도 잠잠해졌다.
터질 듯한 호흡을 진정시키며 정말 아무것도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쥐어짜듯
다시 한 번 외쳤다.

“ 거기 누구야 ? ”

달빛을 가르며 퍼져가던 외침이 차츰 고요 속으로 가라앉을 무렵
또렷한 그리고 아찔한 음성이 수풀 아래 어둠으로부터 울려왔다.

“ 도와주세요 ”

“...... !”

“ 거기 누구 있죠? 저좀 도와주세요 ”

“ 누..누구 ? ”

“ 할머니랑 약초캐러 왔다가 길을 잃었어요 도와주세요 ”

거짓말처럼
이 깊은 산중에 달빛이 춤추는 시간, 여린 듯, 깨질듯,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 어디에 있어요? 여기 망루 보여요 ? ”

“ 네.. ”

“ 망루아래 사다리 보이죠? 올라올 수 있겠어요 ? ”

“ 네 고마워요 ”

서둘러 램프에 불을 키고 사다리 아래를 비추었다.
비로소 내 시야에 그녀가 들어왔다. 망루아래까지 와 막 사다리를 잡고 오르려하는
그녀, 언뜻 고개를 들어 불을 비추는 날 한번 올려보고 은은한 달빛을 받아
수많은 바다 물방울들처럼 반짝이는 긴 머릿결을 일렁이며 점점 내게로 가까이
올라오고 있었다.

위에서 그녀에게 램프를 비춰주는 내 손은 여전히 떨렸다.
호흡역시 가빠 숨쉬기도 힘들고,
거의 다 올라온 그녀의 숙여진 머릿결이 두렵기도 하고..
망루 위까지 다 올라와 고개를 들면 입가에 피가 묻어있을 것 같기도 하고
눈동자가 새빨갛게 이글거릴 것 같기도 하고..
그 짧은 순간 정말 많은 상상이 내 머릿속을 휘저었다.
다 올라와서 두 손을 짚고 몸을 일으킬 때 난 나도 모르게 뒷걸음쳐
그녀에게서 물러섰다. 다 올라온 그녀도 바닥에 주저앉아서 가만히 있고..

가스램프의 빛이 비추는 망루 안에 그녀와 나 꼼짝없이 가만히 있기만 했다.
그 미칠 듯 한 적막을 깨고 더듬거리며 그녀에게 말을 건냈다.

“ 저.. 어디 다친 곳은..없나요 ? ”

그러자 스르르 그녀도 고개를 들어올려 날 마주 바라보며 대답했다.

“ 네... ”

처음 우리 둘의 시선이 맞부딪혀 서로의 시선을 살폈다.
정말 다행히 눈이 빨갛지도 않았고 입가에 피가 묻었거나 칼을 물고 있지도
않은, 눈동자와 머릿결이 까맣고 선명한 아름다운 여인이
옷 여기저기는 어딘가에 긁혀 더럽혀지고 무서움과 공포, 경계의 빛을 보이며
앉아있었다.

“ 배고프죠 ? ”

귀신이면 어떤가.. 저렇게 잔뜩 겁을 집어먹은 예쁜 귀신이면..
물통에서 물을 따라 부탄가스를 켜고 컵라면 봉지를 뜯고 있는 날 보며
그녀는 아무 말이 없다.

“ 여기 제가 있는 건 어떻게 알고 왔지요?

“ 불빛.. 불빛이 보였어요 인가인줄 알고 무작정 왔는데 부근에 오니까 아무것도
없더군요.. 전 제가 귀신에 홀린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던지... “

“ 후훗.. 귀신요? 이거보세요 전 그쪽 때문에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기나 해요?
1분전까지만 해도 당신이 100년 묵은 여우로 변할까봐 숨도 제대로
못쉬었다구요 “

그러자 비로소 그녀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번지며 깊은 한숨을 내쉬고
벽에 편하게 기대어 앉으며 물었다.

“ 그런데 여기서 뭐하는 중인가요? ”

“ 산불감시요 ”

“ 산불감시 ? ”

“ 그래요 전 공익근무요원이구 여긴 감시탑이죠 ”

“ 당신 혼자 여기서 매일 이렇게 사나요 ? ”

“ 아뇨.. 건조경보가 내려지면 일주일에 두 번 오후에 왔다가 아침에 내려가요 ”

“ 아..그렇구나 ”

라면에 물을 부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 고마워요 아까 점심먹고 첨이내요 ”

그녀는 정말 배가 고팠는지 내어준 봉지김치도 곁들이며 국물까지 호-호-
불어가며 다 먹었다. 그녀가 먹는동안 다시 물을 올려 커피를 끓였고
먹은 자리를 치우는 그녀에게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건냈고 나도한잔 따라 들곤
망루 모서리를 하나씩 차지하곤 앉아서 아무말 없이 홀짝이기 시작했다.

다시 고요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커피를 홀짝거리는 소리와 가스램프에서 나오는 스으으- 하는 소리만 겨우
적막에 대항해 버틸 뿐이었고.. 그러다가 가스가 떨어졌는지 스으윽..하는 소리와 함께
램프불이 꺼지고 말았다. 아까 책을 읽다가 끄지 않고 잠들어서 빨리 꺼진 듯싶었다.

“ 그럼 언제 내려가세요 ? ”

갑자기 어두워진 공간이 어색했는지 그녀가 물었다.

“ 아침에 내려갈꺼예요 한 9시 쯤.. ”

“ 네.. ”

“ 날이 밝아오면 길 알 수 있겠어요 ? 저랑 아래 마을까지 같이 가요 ”

“ 네.. 감사합니다. ”

그리고.. 시간과 공간은 달빛의 몫이었다.
더 이상 그녀와 나 아무 말 하지 않았고 주변은 한 시간 전의 별 일 없는 적막으로
돌아갔다.
달빛아래 구석에 웅크리고 앉은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여전히 검은 머릿결엔 달빛이 매달려 흘러내리고 있고 얼굴을 무릎에 묻고 두 다리를
감싸안은 희고도 긴 손이 신전의 대리석처럼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공연히 머쓱해져 담배를 피려고 불을 붙이려다 그녀에게 물었다.

“ 저 담배좀 피워도 될까요 ? ”

“ ..... ”

그녀는 그렇게 잠들었다.
나는 조심조심 일어나 침낭을 펴서 그녀의 몸을 감싸주었으며
작게 웅크린 몸을 깨지않게 조심조심 침낭으로 덮어주며 그녀의 머릿결에서
풍겨오는 향기에 그만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 향기는 너무도 흔한 샴푸향도, 비누향도 아니었고 향수도 아니었다.
그녀의 체취와 향이 은은하고 알맞게 결합되어 영혼 깊숙이 스며오는
마법 같은 무엇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와 담뱃불을 붙이려다 그녀로부터 스며나오는 향기가
사라질까봐 피지 않았다.
그리고 나 역시 구석에 그녀와 똑같은 모습으로 웅크리고 앉아 갑자기 나타난
그녀의 존재를 신기해하며 끊어질 듯 아스라이 밀려오는 그녀의 향기에 취해
눈을 감고 후각에 온 신경을 집중해 그녀를 느꼈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달빛과 그녀의 향기에 취해 잠이 들었다.

...................................................................................................................

제일 처음 내 의식 안으로 들어 온건 새소리였다.

그다음 의식이 돌아오며 떠오른 생각은 지난밤의 그녀가 꿈 이었나 하는 것이었고
한창 쏟아져 들어오는 숲 속의 아침 햇살에 두 눈을 부비며 바라본 곳엔
옆으로 웅크리고 누워 침낭을 온몸에 돌돌 말고 잠든 그녀가 있었다.

‘ 귀신이면 아침 햇살 속에 잠자고 있을 리 없지..’

피식 웃음을 지으며 햇살아래 잠든 그녀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흘러내린 까만 머릿결이 이마며 뺨으로 드리워져 있고 하아얀 볼과 이마
그리고 짙은 속눈썹이 감은 두 눈 위에 길고 촘촘히 돋아있고..
약간 벌려진 붉은 기 감도는 귀여운 입술 사이로 하얀 치아가
빛을 받아 반짝거리며 보석처럼 박혀있고..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정지된 시간 속으로 몰입하고 말았다.
그건 나의 삶에 일어난 특별한 순간이었다.

창을 통해 쏟아지는 투명한 햇살이 잠든 그녀위로 폭포처럼 흘러내리고, 흐르며
부셔지는 빛 알갱이들이 포근히 쌓여 옆으로 누워 잠든 그녀를 눈부시게
했다. 그건 흡사 태양이 그녀를 쓰다듬어 어루만지며 입 맞추고 있는 착각이 들만큼
눈부시게 아름다웠으며 지난 밤 달빛 속에 숲을 가로질러 내게 온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에게 오빠인 태양신 아폴론이 토닥이며 어루만지는 듯 했다.

여신.
그녀는 상상에서 현실로 다가온 여신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눈부시게..

한동안 멍해져서 그녀를 응시하다가 불에 데인 듯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리곤
조심조심 사다리를 타고 땅위로 내려왔다.
숲의 아침은 이미 화사하게 깨어나 여러 미묘한 소리들로 웅웅거리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벌의 날게소리, 여기저기 바삐 날아오르는 새소리, 그 모든걸
비추는 햇살
그리고
향긋한 숲의 소리..
멀리 발아래 솟아있는 봉우리들을 보며 깊은 심호흡을 했다.
천천히 그리고 깊게..
온몸이 싱그러워 지도록..
깊게..

“ 일찍 일어 나셨내요 ”

두 팔을 크게 펴고 호흡을 고르는데 뒤에서 그녀의 음성이 들렸다.

“ 아.. 일어났어요? ”

“ 네 ”

문득 그녀와 마주서자 쑥스럼이 몰려왔다. 그녀역시 그런건지 미소만 머금고
시선은 슬쩍 땅을 보고있고,

“ 여기 나란히 서서 저 따라해봐요 ”

“ 네 ? ”

“ 자.. 두 팔 이렇게 크게 펴면서 호흡을 천천히 깊게..들이쉬고..”

“ .... ”

그녀는 순순히 만세를 부르듯 두 팔을 들며 숨을 들이쉬었다. 순간 터져나오는
하품과 연결되더니 아차..싶은 표정으로 입을 막으며 움츠렸지만
결국엔 두 눈에 눈물까지 맺히도록 하품을 하고 말았다.
꼭 몰래 장난치다 들킨 아이같은 그녀를 보자 웃음이 나왔고
그녀역시 마주보며 환하게 웃었다.

“ 집에서 걱정할 텐데 내려가죠 ”

“ 네..그래야 겠어요 ”

그녀와 나란히 아침 숲 속을 걸었다.
둘 다 아무 말 없었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았고 오랜 시간 전부터 사랑해온
연인인 듯 충만한 교감이 오고갔으며 오솔길 옆 스치는 잎사귀의 느낌마저
내 맘을 기쁘고 설레게 했다.

길게만 느껴지던 하산길이 아쉬울 만큼 일찍 끝났고
마을로 접어드는 마지막 산자락에서 갑자기 그녀가 몸을 웅크리며
풀 숲 뒤로 몸을 숨겼다.

“ 왜 그래요 ? ”

“ 쉿... ”

“ ? ”

“ 동내 분 들 보시면 마을에 소문나요 저 시집은 다 간다구요 ”

“ 아하.. ”

“ 먼저 내려가세요 한 5분 있다가 따로 내려갈께요 ”

작은 토끼처럼 두 눈을 마을 쪽으로 향하며 소곤거리는 그녀를 보자
또 웃음이 터져나왔다.

“ 아이 참... 웃지마요.. 난 심각하다구요 ”

“ 걱정 말아요 못 본 척 할 테니.. 그리고 영원한 비밀로 지켜야 하는거죠? ”

“ 물론.. ”

그녀는 물론이란 말을하며 두 입술을 굳게 다물며 장난스레 비장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 그럼 저 갈께요.. ”

“ 네 고마웠어요 ”

살짝 손을 들어 흔들며 미소짓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발길이 멈칫 거렸지만 별 수 없이 씨익 웃어주곤 뒤돌아 걸음을 옮겼다.
몇 발자국 아쉽게 떼었을까.. 문득 그녀가 물었다.

“ 또 언제 감시하러오나요 ? ”

“ 3일 후요 .. 한 4시쯤 이리로 올라갈 꺼예요 ”

“ 네..”

다시 뒤돌아 걸음을 옮기며 4시쯤 이리로 올라 올꺼라 말한 자신이
쑥스러워졌다. 시간을 물은 것도 아닌데.. 마치 속마음을 들키기라도 한 듯
걸음을 빨리해 도망치듯 숲으로부터, 그녀로부터 멀어져 나왔다.

그래도..
혹시..
그날 그녀가 이 오솔길 어귀에 와주지 않을까...?

...........................................................................................

점심 무렵이 되면서부터 괜히 조바심이 났다.
벌써 사흘이 흘러 내 근무 날 이 다가와, 예전 같으면 별로 내키지 않는
맘으로 출발 전 시간을 보내곤 했지만 오늘은 아니다.
그녀와 만난다는 보장은 없지만 상상은 이미 그녀와 마지막으로
헤어졌던 마을 어귀 오솔길을 서성이고 있었다.

오늘 하루도 가을치곤 꽤 무더운 화창한 날씨여서
달빛도 은은히 아름답겠다..는 생각을 하며 배낭을 메고
일찍 나서기로 했다.

“ 어.. 벌써가? ”

“ 어.. 잠깐 어디 들렀다 바로 가려구.. ”

“ 그래.. 오늘도 수고하라구.. ”

어제 근무선 녀석이 하품을 하며 인사를 한다.
시간은 오후 2시쯤 되어 좀 이른 감 이 있었지만 그냥 출발했다.

아직은 따가운 가을햇살을 느끼며 담배를 피워 물곤 달빛과 햇살아래
빛나던 그녀를 생각하며 산으로 향했다.
시간이 일러 느릿느릿 걸었지만 어느새 마을 이장 댁 슈퍼 앞까지
와버렸고 나무평상에 배낭을 내려놓고 새로 담배를 피워물곤
한눈에 들어오는 작은 동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보이진 않았다.

“ 오늘은 일찍오내 ”

“ 네.. 안녕하세요 ”

“ 요새 밤에 춥지? 낮엔 이리 더워도 밤엔 제법 쌀쌀해 더구나 산 위에서..
쯧쯧.. “

“ 아직은 괜찮아요 침낭도 있고 뜨거운 차도 끓일 수 있는걸요 ”

사람 좋은 이장님이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가더니 컵라면과 소주를 들고
나오셨다.

“ 자 가져가.. 젊은 사람 고생하는데 줄거라곤 이것 뿐이내.. 아..가스는 있어 ? ”

“ 아.. 부탄가스 하나랑 컵라면 하나 더 주세요 ”

배낭을 풀어 지갑을 꺼내자 이장님이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리셨다.

“ 에이.. 이사람아 넣어둬.. 자 가스랑 라면.. 역시 젊은이라 많이 먹는구먼.. ”

순간 오지도 않을 그녀를 떠올리며 라면 하나를 더 산걸 이장님께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허둥거리며 지갑을 넣었다.

시계를 보니 3시를 가르키고 있었다.
배낭을 짊어지고 일어서니 이장님이 물었다.

“ 벌써 가려구? ”

“ 네.. 일찍 올라가서 물통에 물좀 길어다 놓으려구요 ”

“ 아 그렇구만.. 거기 물 길으려면 아래 개울까지 내려가야 하지 ? ”

“ 네.. 그럼 저 올라가보겠습니다. ”

“ 그래.. 수고하게 ”

그녀생각을 들키기라도 할까봐 얼른 돌아서 오솔길 어귀로 접어들었다.
물은 어제 근무자가 떠놓았다 했으니 일찍 올라갈 필요는 없었고
그녀와 헤어졌던 이 부근에서 4시 반 가량까지 혹시 하는 마음으로
그녀를 기다리다가 올라갈 생각이었다.

막 산으로 접어들어 좁은 오솔길 굽이를 지나 그녀가 웅크리고 숨었던
풀숲 이 있는 곳 까지 와서 다시 배낭을 내려놓고 털썩 주저앉았다.

‘ 정말 그녀는 올까..? ’

‘ 괜한 기대일까...? ’

날벌레 한 마리가 눈앞에서 위잉 거리며 성가시게 할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 약속없이 이곳에 올 리 없는 그녀를 상상하며 기다리는 건
무척 즐거운 일이었다.
달빛이 미끄러지던 검은 머릿결과 아득한 향기, 그리고 햇살아래 감싸여
눈부시게 잠든 모습.. 마주보면 빨려들 듯 검고도 맑은 눈망울까지..

그녀를 상상할 때마다 시간은 멈추고 세계가 정지된 듯, 고요해졌으며
그 안에서 그녀는 여신처럼 빛나곤 했다.

그녀와 좀더 친해졌으면..
아름다운 그녀 곁에서 좀 더 자주 마주 웃을 수 있었으면..

그때 무언가 내 발아래로 ‘ 툭 ’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꿈에서 깨듯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린 곳에
거짓말처럼,
생긋웃는 그녀가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한쪽 눈을 찡긋 하며 또 무언가를 내게 던졌다.
무릎위로 떨어진걸 보니 솔방울이었다.

“ 안녕하세요 ? ”

“ 네.. 거기 앉아서 뭐하세요 ? ”

“ 아..저... 올라가려구요 ”

“ 후훗.. 늘 거기서 한번 쉬고 올라가는 건가요 ? ”

“ 아니..저..그게..”

“ 글쎄요.. 제가 보기엔 누구 기다리는 것 같은걸요 ? ”

생긋 웃으며 약 올리듯 그녀가 말했다.
그렇게 말하며 내 앞으로 다가오는 그녀를 바라봤다.
면바지에 갈색 난방 그리고 빨간 운동화
어깨위로 물결치는 머릿결과 환한 웃음..
눈부신 그녀..

“ 뭘 그렇게 유심히 봐요 ? 쑥스럽게.. ”

“ 네..? 아.. ”

“ 댁처럼 예쁘고 큰 눈 가진 남자가 뚫어져라 쳐다보면 여자는 쑥스러워 진다구요 ”

“ ...... ”

그녀의 음성은 숲을 가로질러 불어오는 산들바람처럼 상쾌했다.
천천히 다가와 내 옆에 앉더니 두 무릎을 세우고 팔로 감싸고는
그날 밤 망루 위에서 잠든 모습처럼 가만히 있었다.

왜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은 늘 멈추는걸까.
그렇게 나란히 앉아있는 것 만 으로도 세계는 정지했다.

“ 이름이 뭐죠 ? ”

“ 민정.. 유민정 이예요 ”

“ 전 은혁 이예요 탁은혁 ”

“ 탁 ? ”

“ 내.. 탁.. 탁 은 혁 ”

“ 탁.. 은혁... 타다닥...! ”

그녀의 장난에 자연스레 마주보고 웃었다.
그녀의 웃음.. 눈부신 햇살..

“ 어릴 적부터 쭈욱 이 동내에서 살았나요 ? ”

“ 중학교 까진 여기서 다녔구요 서울서 대학 다니다가 휴학하고 내려왔어요 ”

“ 네.. ”

“ 산위에 안 올라가세요 ? ”

“ 이제 가봐야죠 ”

시계를 보니 어느새 5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일어나며 배낭을 메고 엉덩이에 묻은 흙을 툭 툭 털어내는데 함께
일어서던 그녀가 물었다.

“ 하루 밤 보내면서 무슨 짐이 그렇게 많아요 ? ”

“ 읽을 책이랑 간식거리 가스 .. 그런 것들이죠 ”

“ 어휴.. 밤새 먹기만 하려구요 ? ”

“ ... 글쎄요.. 혹시 모르죠.. 또 밤에 누군가 도와달라고 나타나면
줘야 하니까.. “

“ ........ ”

“ ........ ”

그 순간 내 입에서 나오려 했던 말은 ‘ 밤에 놀러올래요 ? ’ 였지만
그 말이 가진 또 다른 뜻을 떠올리곤 하지 않았다.
밤에 놀러올래요 라니... 그 깊은 산으로 밤중에 찾아오라는 것도 우습지만
남자혼자 있는 산속으로 처녀더러 찾아오라니...
쓴웃음을 삼키며 산으로 향하는데 그녀의 음성이 들렸다.

“ 은혁씨 밤에 혼자 안무서워요 ? ”

“ ...... 무서우면 같이 있어주게요 ? ”

“ .... ”

장난처럼 받아친 내 말에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그걸 보자 내 얼굴도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 한밤에 산속에 있는 늑대랑 단 둘이 ? ”

어색했는지 오히려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그녀가 물었다.

“ 100년 묵은 여우가 더 무서웠어요 ”

내 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곤 코끝을 찡그리며 말했다.

“ 어머.. 저 여우로 안 변했었잖아요 ”

“ 저도 늑대로 변하진 않았죠.. ”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해가 기울기 시작해서인지 제법 서늘한 기운이 바람결에 스며있었고
그 바람결에 그녀의 향기가 날아와 코끝을 간지럽혔다.

“ 그만 올라가봐야 겠어요 ”

“ 네.. 수고하세요 ”

“ 그럼.. ”

그녀로부터 멀어져 산을 오르는 이 길에 아쉬움이 가득 내려앉는건 뭘까
그녀를 또 언제 볼 수 있을까 ? 혹시 내일 아침 ? 조금 전처럼 날 만나주러
오솔길 어귀에 서 있어주진 않을까 ?
만약 내일 아침 그곳에 그녀가 있다면 함께 점심을 먹자고 해야지
그리고 시내로 나가 늘 혼자 걷던 거리를 그녀와 함께 걸으리라.

텅 빈 듯한 내 맘에 그녀는 사랑스럽게 피어나 날 감싸고 영혼을
휘감아 왔다. 담쟁이 넝쿨처럼.

............................................................................

오늘 밤은 유난히 추웠다.
달은 여전히 환하게 숲을 비추었고 우주는 고요했지만 갑자기 떨어진 기온탓에
침낭을 둘둘말고 구석에 앉아 꼼짝않고 소주만 홀짝였다.
사흘이 흘렀지만 아직 침낭엔 그녀의 향기가 남아있었다. 영혼을 찌르는 마법..
램프의 불을 끄고 침낭을 두르고 창가에 서서 그녀의 향기와
일렁이는 달빛을 헤아리며 별을 바라보았다. 날카롭게 날이 선 대기가
곧 다가올 겨울을 얘기하고 밤새가 괴로운 듯 소리죽여 울었다.
오늘밤은 유난히 쓸쓸하다..
망루로 올라오는 오솔길 가에서 무언가에 놀란 듯 새 한 마리가 푸드덕 거리며
날아올랐고 허공에서 아쉬운 듯 울음을 흘리며 북쪽하늘로 사라졌다.
바람이 잎사귀를 흔드는 부스럭 소리가 아래로부터 들려왔고 점점 물기를
잃어가는 잎들의 하소연처럼 그 소리는 끝없이 들려왔다.
바람에 흔들리는 잎들의 소리.. 바람에.. 바람에..
순간.
무언가 섬뜩함과 함께 떠오른 생각은 지금 대기에 잎을 흔들만큼 바람이
불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럼 저 오솔길에서 끝없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뭘까..?
어느새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귀를 기울였다.
그 소리는 오솔길 멀리에서 들리다가 점점 망루부근까지 가까워졌다.
바스락.. 바스락..
달빛아래 무언가 움직이는게 보였다.
바스락.. 바스락..
흐릿하게 꿈결처럼 움직이던 물체가 어느새 망루 아래까지
다가왔고 그건.. 그녀였다. 달빛이 수없이 매달려 반짝이는 머릿결을 일렁이며
희미하게 빛나는 대리석같은 손을 흔들며..

“ 은혁씨.. ”

“ 민정씨 ? .. ”

망루 위 내 음성을 확인하곤 사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 어떻게 여길... ”

“ 후훗.. 은혁씨 무서울까봐 왔죠.. 이 어두운 산을뚫고 여기까지 왔는데
겨우 인사가 ‘어떻게 여길’ 인가요 ? “

“ 후레쉬도 없이.. 부모님 걱정 안해요 ? ”

“ 달빛이 이렇게 밝은걸요 저도 무서움 많이 타지만 산위에 은혁씨 있다 생각하니
별로 안무섭던데요 “

“ ............. ”

너무 반갑고 뜻밖이라 멍하니 바라만 보고있자 수줍은 듯 웃으며 처음 그녀가
잠들었던 구석에 웅크리고 앉으며 말했다.

“ 그리구 부모님은 괜찮아요 할머니랑만 사니까.. ”

“ ....... ”

“ 작년에 사고로 두분모두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저도 휴학하고 할머니 모시려구
와있는거구요.. “

“ ....... ”

“ 우리 할머니 약간 치매예요 .. 아마 한 일주일 쯤 집에 안가도 있는지 없는지
모르실 껄요 “

“ 네... ”

그 순간 무얼 해야할지 엉뚱한 걱정을 하기도 하고 공연히 어둠이 어색해
램프를 밝히려고 라이터를 켰다.

“ 그냥 있어요 달빛..예쁜데요 ”

“ 네 ”

램프는 그만두고 물통에서 물을 받아 찻물을 올렸고, 파랗게 퍼져가는 가스불빛과
달빛이 서로 부딪혀 흔들렸다.

“ 민정씨 안추워요 ? ”

“ 걸어올땐 몰랐는데 조금씩 싸늘해 지내요.. 은혁씨 추웠겠다. ”

“ 조금요.. 얼마 전까진 달빛이 부드러웠는데 오늘은 날카롭내요 ”

“ 어머.. 기온의 차이를 달빛으로 ? ”

“ 아.. 저.. 그냥 그렇다는 거죠 ”

두개의 종이컵에 커피믹스를 넣고 물을 따랐다. 망루 안에 훈훈히 퍼지는 커피 향..
달빛아래 마주앉아 잠자코 커피를 마셨다.
커피를 다 마시고 서로 마주앉아 웅크린 체 아무 말 없었다. 뭔가 모를 어색함에
억지로 말을 꺼내려 했지만 차츰 그런 불균형한 시간에 동화되어갔다.
그저 함께 이 공간에 있는 그녀의 존제, 그리고 나, 그리고 달빛..
아무 말없이 있는 동안 이 세 가지가 차츰 동화되더니 어색하고 불편한 공간이
침묵속에 융화되기 시작했고 점점 마음도 편해졌다.
한가지 아쉬운 건 기온이 더 떨어지고 있었다는 것.

완벽한 침묵의 균형을 허물며 몸을 일으키곤 침낭을 들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 많이 추워졌죠 ? ”

“ ... 내.. 은혁씨 덮으세요 ”

“ 후훗.. 이렇게 오돌오돌 떨면서 저 덮으라구요 ? ”

아닌게 아니라 가까이 와보니 그녀의 몸이 약하게 떨리고 있는 게
느껴졌던 것이다.

“ 정말 꽤 춥내요 늘 이랬나요 아님 오늘 이런가요 ? ”

“ 음.. 3일전에 같이 있었을땐 이렇게 춥진 않았고..오늘부터 이렇내요 ”

“ 아..참.. 지난번에 같이 있었지.. ”

“ 바 아 보 ”

“ 어머.. 너무해 여우로 변해버릴까 보다. ”

“ 민정씬 여우로 변해도 예쁘고 귀여울 것 같아요 ”

“ .... ”

그렇게 말해놓곤 또 속맘을 들킨 것처럼 허둥대며 내 자리로 돌아와
웅크리고 앉았다. 그녀도 아무 말 없었다.

고개를 들어 창 너머 하늘을 보니
환한 달빛 곁으로 구름들이 모여들고 있는 게 보였다.
꽤 짙은 빛을 띤 먹구름이 환한 달빛 주변으로 모여들며 퍼지고 있었고
구름 일부분이 조금씩 달을 가리기도 했다.
어쩌면 비가 올지 모르겠다 생각하는데 그녀의 음성이 들렸다.

“ 제가 예쁜가요 ? ”

물기어린 촉촉한 음성이 날 감싸왔고
그 순간 난
사랑에 빠졌다.

“ ..예뻐요 그리구.. 사랑스러워요 ”

“ ..... ”

“ ..... ”

입안이 바싹 타들어가는 듯한 침묵이 이어졌다. 눈 앞엔 달빛에 물든 그녀가
침낭을 덮고 앉아있고, 정신을 흐리게 하는 향기가 끊임없이 맴돌았다.
점점 목이 타 올라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에 기대어 별을 바라봤다.
점점 더 많은 검은 구름이 하늘을 가려가고 순간 구름사이로 유성이
빠르게 흘러갔다. 그런 내 등뒤로 인기척이 나며 그녀가 다가오는게 느껴졌다.
이어서 전해오는 어께 위 포근한 침낭의 감촉..

“ 괜찮아요 은정씨 덮어...요... ”

“ 어맛... ”

난 그녀가 침낭을 내 어께위로 걸쳐주는 줄 알았다.
그래서 몸을 돌리며 사양하려 했던건데..
그녀는 자신도 덮은 체로 어께동무 하듯 나란히 덮으려 한 팔로 침낭을 들어올리는
중 이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갑자기 난 돌아섰고 엉겁결에 우린 마주 끌어안고
함께 침낭을 두른 모양이 되고 말았다.

“ ........... ”

“ ............ ”

내 어께 위로 양쪽 침낭 모서리를 잡은 그녀의 팔이 둘러있고 중심이 내게로 쏠리며
그녀의 가슴과 배, 무릎이 온몸에 부딪혀 왔다.
달빛아래 깜짝 놀라 동그래진 그녀의 예쁜 두 눈이 반짝였고 달콤한 숨결이
내 입술위에서 춤을 추었다.
그리고..
향기.

둘 다 너무놀라 꼼짝없이 가만히 있었고 부딪힐 듯 가까운 우리 두 시선이
허공에서 사그락 소리를 내며 흩어졌으며.
새근거리며 내쉬는 그녀의 숨결이 내 입가에 내려앉고 점점 커지는 내 심장
고동소리만큼 그녀의 호흡도 커져갔다.

나의 가슴과 배로 그녀의 온기가 스며오기 시작했고 호흡에 맞춰 오르락 내리락
하는 율동이 넘실대며 날 휘감았다.

그녀의 마법같은 향기가 짙게 스며오자 내 생각은 멈춰버렸으며 깍아놓은
조각상같은 그녀를 두 팔로 깊게 끌어안으며 입을 맞췄다.

“ 흡... ”

그녀의 손이 다급히 내 어께를 짚었으나 눈은 감겼고 손엔 힘도 들어있지 않았다.
입술로 그녀의 윗입술을 머금고 조심스레 빨자 보드랍고 촉촉한, 감촉이
입술을 타고 가슴 깊숙이 어딘가 숨겨있는 기억의 저장소로 흘러들어왔고
두 손바닥 가득히 그녀의 난방 아래 매끈한 등의 촉감이 느껴졌다.

얼마나 그렇게 있을까 그녀의 양손이 서서히 내 목을 휘감아 왔고
조심스레 윗입술을 빨고있는 나에 맞춰 그 귀여운 입술을 조금씩 오물거리기도 하고
마주 나의 아랫입술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가슴과 배 허벅지까지 빈틈없이 그녀의 육신이 기대어 와 알 수 없는 뭉클함이
전신을 휘감아 갔고 어느샌가 맹렬히 발기한 성기가 그녀의 아랫배에 눌려
묵직하게 느껴졌다.
그녀도 자신의 아랫배에 단단하게 부딪혀오는 감촉에 움찔 놀라더니
서서히 입술을 떼어냈다.

어둠속에 서로 응시하며 거친 호흡만 흘렸다. 온몸은 아직 꼭 붙어서서
서로의 호흡에 따라 움직이는 가슴과 배의 율동을 나누며..
먹구름이 달을 가린 탓인지 흐릿한 윤곽만 보였다.
이렇게 가까이 마주보고 있는데, 그녀의 숨결이 내 얼굴을 간질이는데,
자세히 보이지 않는다는게 몹시 낯설었다.

그 어둠속에서 그녀가 말했다.

“ 은혁씨... 늑대로 변한건가요..? ”

장난스런, 한편으론 걱정스런 .. 젊은 처녀의 수줍음과 조심성이 베어있는
질문...

“ 민정씨가 여우로 변했던건 아니구요 ? ”

“ 어머.. ”

살짝 투정부리듯 고개를 숙이며 어께를 툭 쳤고. 동시에 그녀의 이마가
어둠속의 내 이마와 맞닿았다.

순간 구름사이에서 달빛이 밝아오며 눈앞에 펼쳐진 그녀의 머릿결을
출렁이며 지나갔고 서서히 얼굴을 들어 날 올려봤다.
하얀.. 신전에 바쳐진 대리석같은 피부가 빛나기 시작했고 향긋한 숨결이
새어 나오는 입술 틈 보석처럼 박혀있는 치아가 눈을 찔렀다.
난 그만 견딜 수 없는 격정에 휩쓸려 힘껏 그녀를 끌어안으며 크게
입맞춰 나갔다.

“ 흐읍.. ”

그녀의 마지막 숨결이 내 입술아래 묻혀졌고 거세게 끌어안은 두 가슴아래
그녀의 포근하고 봉긋한 젖무덤이 짖눌려왔다.
너무 갑작스런 강한 입맞춤에 그녀의 두 손이 다시 허둥거렸고
애타게 입술 사이로 그녀를 찾아 들어간 나의 혀가 촉촉하고 녹을 듯 보드란
그녀의 혀를 휘감자 팽팽하던 끈이 끊어지듯 그녀의 전신에서 힘이 빠져나가며
깊게 내게 안겨왔다.

아무 소리도, 아무 생각도, 모든 게 타버리듯 사라졌고 짙은 어둠 속에
그녀만 존재했다.
끝없는 촉촉함으로 날 감싸는 그녀의 혀에 끝없는 심연으로 떨어져갔고
온몸에 부딪히는 그녀의 파도에 영혼까지 넘실댔다.
윤기나던 치아를 하나하나 각인하듯 핥아나갔으며 조금씩 고이던 그녀의 타액을
힘껏 빨아 마셨다.
가녀린 그녀의 등을 끝없이 쓰다듬다가 난방 아래로 손을 넣어 팽팽하게 묶여있는
브레지어 후크를 풀었으며 ‘ 툭 ’ 하는 음향과 함께 그녀의 몸이 움찔
흔들렸지만 이내 더욱 깊게 내게 안겨왔고 이젠 성급함에 떠밀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서툴게 난방 단추를 푸르고 허물을 벗겨내듯 어께 뒤로
밀어 내렸다.
몹시 떨리는 호흡으로 그녀는 내가 하는데로 맡긴 체 서 있었으며
바닥에 떨어진 침낭을 바로 펴고 그녀를 끌어당겨 뉘곤
어둠 속 뽀얗게 떠오르는 젖가슴으로 입술을 가져갔다.

차가운 공기 아래 파르르 떨리듯 유두가 영글어 있었으며 나의 입술 안으로
들어오자 금새 부드러워지며 뜨겁게 녹기 시작했다.

“ 흑.... ”

탄식하듯 그녀의 신음이 흘러나왔고 나의 혀가 유두위에서 끝없이 미끄러지자
그녀의 하얀 양 손이 머리를 감싸왔다.

작은 포도알같은 유두는 사랑스러웠다.
입술을 동그랗게 오무려 살짝 빨아도 보고 혀 전체로 쓰다듬듯 핥아보고...
그녀의 가녀린 손가락이 내 머릿결 사이로 파고들어 끝없이 떨렸고
조금씩 어두운 공간으로 그녀의 탄식이 퍼져갔다.

손을 내려 바지 단추를 풀었다.

“ 안..돼 ”

허둥거리는 손이 다급히 내 손을 잡아왔지만
자꾸만 어딘가로 떠밀리는 듯 다급한 내 행동에 그녀의 몸은
차츰 허물어 졌다.

입술이 미끄러져 내려와 배꼽을 지나 끝없는 매끄러움으로 펼쳐진 아랫배 위를
맴돌았고 그녀의 면바지를 잡고 끌어내렸다.

그녀의 호흡이 더 불안정하게 맴돌았고 짙어진 구름 속 어두운 공간에
팬티만 입고 누워있는 그녀를 내려보며 성급히 옷을 벗었다.
어두움이 짙다는 사실에 안도를 느끼며 팬티까지 벗어버리고 조심스레
그녀위로 몸을 겹쳐갔으며 우리의 맨 살들이 소스라치듯 놀라며 엉켜갔다.
두 가슴 가득 부드런 젖가슴이 밀려왔고 그 감촉 사이 작은 유두의 저항이
꿈틀거렸으며. 어둠 속 내 입술에 그녀의 귀가 부딪혔고 귓불을 입술로 덮자
길고 보드란 두 팔이 내 목을 감아왔다.

“ ..은 혁 씨.. ”

애타게 내 이름을 부르는 그녀를 입술로 덮어갔고 아까보다 좀 더 깊고,
격렬하게, 두 혀가 엉켰다. 배 아래 그녀의 배가 미끄러지며 춤을 추었고
미친 듯이 발기한 성기로 그녀의 허벅지가 부딪혀 왔다.

끝없이 이어지던 입맞춤.. 그리고 혀의 애무..
갈증에 겨워 그녀의 타액을 마셨으며 그녀의 향기도 쉼없이 마셨다.
내 등과 어께, 머리위로 그녀의 손이 춤을추었고 그녀의 온 몸 구석구석
쓰다듬는 내 손으로 경험한적 없는 부드러움의 비밀이, 애타는 사랑이
가득 잡혀왔다.

풍만하면서도 갈증이 나는 그녀의 엉덩이를 쓰다듬다가 팬티를 벗겨냈고
무의식적으로 두 다리를 오므리는 무릎을 열고 그녀 위로 빈틈없이
몸을 실었다.

가슴과 배, 허벅지까지 꼭 맞닿은 그녀의 육체는 사랑이었으며
기억에서 지워진 엄마의 자궁이었고, 깊은 바다였다.

서로 꼭 끌어안고 가쁜 숨을 간간히 내쉬며 엉켜있는 두 혀는 녹아내려
형체조차 없었고 의식이 어디론가 멀리 튕겨져 나가 깊은 심연에서 맴돌았다.
성기 끝으로 매끄러우며 촉촉한 어딘가가 느껴졌고 곧 그녀에게 가는
길이 나타났다.
특별히 의식하고 허리를 움직이지 않았지만 자연스레 그 길을 따라
미끈거리며 내 몸이 침몰해 갔으며 그 중간 어디쯤에 작은 저항을 받으며
잠시 멈췄다..

“ 흐윽.. 은혁씨.. ”

“ 민정씨.. ”

그렇게 꼭 끌어안고 잠시 있었다. 그녀의 호흡이 너무 불안정해서
조심스레 물었다.

“ 아픈가요 ..? ”

“ ... 내 ”

그녀를 쓰다듬으며, 온 몸으로 퍼지는 그녀의 감촉을 느끼며 누워있는데
창 밖 숲으로부터 빗소리가 들려왔다.
한밤 숲에 내리는 비.. 오랜 시간 매말라 있던 대지에 비가 내리고
나무와 잎사귀에도 물기가 오를것이다. 산불을 걱정하며 내려졌던 건조경보도
풀릴테고.. 당분간은 이곳에 올 일도 없겠지...

기온이 더욱 떨어지는 게 벗은 등 뒤로 느껴졌다.
하지만 맞닿은 우리 둘 몸엔 뜨거운 열기가 번져나고 엷은 땀도 베어나왔다.

“ 아직 많이 아픈가요..? ”

“ ... 아니요.. ”

어둠 속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
내 머릴 쓰다듬는 그녀..

“ 제가 지금 무슨 생각하는 줄 아나요 ? ”

그녀가 물었다.

“ .......... ”

“ 은혁씨가 날 사랑한다 말해주었으면.. 그런 생각요 ”

“ .. 저..민정씨 사랑해요 ”

“ ...... ”

“ 정말요 본 순간부터... ”

“ 그만... ”

“ .... ? ”

“ 사랑은 이렇게 빨리 오는게 아니예요 너무 가볍게 말하지 말아요 ”

“ 가볍게 말하는 것 아니예요 ... ”

“ ..... 흐윽.. ”

호흡하며 약간 몸을 움직이자 그녀가 내 어께를 붙잡으며 신음했다.
절반정도 미끄러져 들어간 성기 끝으로 미묘한 그녀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 우린.. ”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녀가 말했다.

“ 우린.. 지금 좋아진 거예요 사랑은 아직 아니죠 ”

길고도 보드란 그녀의 손이 내 머릿결을 쓰다듬었다.

“ 사랑하는 사람과 처음을 보내고 싶었어요 ”

“ .............. ”

“ 이상해요.. 오늘 난 스스로 알던 내가 아닌 것 같아요 ”

“ ........... ”

“ 후회하진 않을꺼예요 은혁씨가 좋았으니까.. ”

“ 우린 서로 사랑하게 될꺼예요 ”

“ ........... ”

“ 사랑하게 될꺼라구요 ”

대답대신 그녀는 깊게 날 끌어안았고 두 손을 힘주어 날 끌어당기며
다음 나의 행동을 이끌었다.
무언의 승낙, 그리고 사랑의 약속

허리에 힘을 주자 무언가 가려진 듯한 곳에서부터 ‘ 툭 ’ 하는 느낌과 함께
깊게 그녀의 몸 끝까지 들어갔다.

“ 아앗... ”

짧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녀의 온몸이 경직됐다.
체모와 체모가 맞닿아 짖눌렸고 그녀는 끊임없이 가쁜숨을 토해냈다.
그런 그녀를 힘주어 안고 토닥이자 차츰 호흡이 가라앉았고
아까보다 제법 거세진 빗소리가 공간을 매워왔다.

망루 지붕과 땅 위, 나무들 위로 쏟아지는 비는 제법 폭우처럼 내렸고
내 마음에도 그녀가 촉촉이 내렸다.

조금씩 몸을 움직이자 그녀의 촉촉하고 아득한 감촉이 감싸왔고 그 느낌은
아찔할 정도로 강하게 온 전신으로 퍼져갔다.

“ 하아... ”

괴로운 듯 그녀는 내 목에 매달린체 신음을 흘렸고 소란한 바깥소리에
곧 묻혀졌다.
한번 두 번.. 조금씩 다급해진 내 움직임도 점점 거세졌고
가녀린 그녀를 격정적으로 끌어안고는
곧 깊은 심연으로 떨어졌다.

귓가에 끝없이 그녀의 신음이 흘러왔지만 고통인지 희열인지 알 수 없었고
기억에 남는건 거센 빗소리와 그 사이 미묘하게 퍼지던 살의 소리 그리고
숨소리 뿐..
차츰 그녀의 소리가 높아졌고 언제부턴가 매끄럽고 긴 두 다리가 내 허리를
감아 꼭 끌어당겨댔다. 정신없이 그녀에게 빠져들던 내 몸짓이 더욱 급해졌고
이어 온몸 가득 차오르는 뜨거운 파도가 넘실대기 시작했다.
순간 그녀의 다급한 호흡이 내 귓가로 몰려왔고 온 몸이 팽팽하게
뒤틀리며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내 등뒤를 할퀴고 지나갔다. 그때였다
눈앞에 무수한 별들이 튀며 격렬한 사정을 한건...

“ 흐으윽... ”

“ 으윽... ”

거의 동시에 우리 둘은 서로를 격렬하게 끌어당기며 외마디 신음을 토해냈으며
정적속으로 침몰했다.

..........................................................................

얼마를 그렇게 있었을까.
그녀 위에 몸을 포갠 체 나른함과 충족감을 느끼며 호흡에 따라
움직이는 그녀의 육체를 안고 있었던 건..

아직 몸은 그녀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고 이따금씩 간닥거리며 마지막
여운을 맛보고 있었다.

사방은 조용했다.
소나기였는지 여기저기 맺혀 방울져 떨어지는 소리 뿐 비는 멈춘 듯 했고
차츰 우리가 흘린 땀이 식어가며 서늘해지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그녀로부터 일어나며 몸을 빼자 낮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 하아... ”

침낭을 바로펴고 그녀를 옆으로 꼭 끌어안곤 자크를 잠궜다.
일인용에 둘이 함께 있어 어려웠지만 더 꼭 끌어안으며 애를 쓴 끝에
둘이 들어갈 수 있었다.
침낭 안은 곧 따스해졌다. 땀으로 젖어 매끌 거리는 그녀의 몸도 온기가 돌아왔고
식었던 손과 발도 포근해 졌다.
알몸으로 사랑스런 여자와 좁은 침낭 안에 있는 건 멋진 일이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곧 그녀의 몸이 탄력있게 부딪혀 왔고
억지로 안으려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안고 있으니까..

그녀가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 입술을 찾아 키스했다.

“ ..... ”

입술아래 그녀의 입술이 차가웠다.

체온으로 녹여주고 싶어 윗 입술과 아랫입술을 정성껏 머금고 빨아당기며
키스했다. 하지만 냉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 민정씨 아직 추워요 ? ”

“ ... 아뇨 ”

그녀의 목소리가 낮고 힘이 없었다.

“ 불편해요 ..? ”

“ ...아뇨 ”

순간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와 나 사이에 이어져 있던 끈이 갑자기 끊어진 듯한 공허한 기분..
뭘까..이 느낌은 ?

“ 민정씨.... ”

“ .......... ”

“ 혹시.. 화..났어요 ? ”

“ ............ ”

알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뭘 잘못한 걸까 ? 그녀 입술에 서려있던 냉기가 마음까지 전해진걸까 ?
갑자기 낮은 소리로 그녀가 울기 시작했다.

“ ...........? ”

침낭안에 너무도 꼭 붙어있어 조금씩 들먹이는 그녀의 떨림이
선명하게 전신으로 전해왔고 곧 어께위로 눈물들이 방울져 떨어져 내렸다.

“ 민정씨... ”

“ ........... ”

그녀의 울음은 계속됐다. 커지지도 않고 잦아들지도 않고 일정하게..
나는 갑자기 몹시 추워졌으며 애가탔다.

어설프게 그녀를 꼭 끌어안아주려 팔을 두르자 그녀가 말했다.

“ 침낭 좀 열어주세요 ”

“ .............. ”

너무나 차갑고 낮은 음성,
마음으로부터 찬바람이 불어오는걸 느끼며 자크를 내렸다.
어둠속에서 그녀가 몸을 일으키더니 떨어져 있던 옷을 하나씩 입기 시작했다.
어둠 속 흐릿하게 브레지어를 채웠으며 팬티를 입었고 돌아앉아 난방단추를
꼼꼼히 채웠으며 몸을 일으켜 바지를 입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울음은
계속됐다.
그렇게 옷을 다 입더니 갑자기 망루 문을 열고는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려했다.
그런 그녀에게 황급히 다가가 손을 잡으며 말했다.

“ 어디가요 ? ”

“ ........... 집에.. 가야겠어요 ”

“ ...왜..? 왜 갑자기 이러는 거죠 ? ”

“ .............. ”

“ 내가 뭘 잘못한게 있나요 ? 말해줘요 .. ”

“ ............. ”

“ 민정씨.. 저 민정씨가 좋아요 장난으로 이런 것 아니예요 ”

“ 은혁씨가 뭘 잘못한건 없어요 ”

“ 그럼 왜... ”

“ ............. ”

갑자기 타는듯한 갈증이 밀려왔다. 그녀는 왜 이러는 것일까..?
대체 왜 ?

망루안이 점점 추워졌다. 그제야 내가 알몸인걸 알곤 옷을 입기시작했고
그녀는 얼어붙은 듯 미동도 없이 가만히 앉아있었으며 옷을 다 입고
답답함에 램프를 켜려하자 그녀가 제지했다.

“ 켜지 마세요.. ”

여전히 싸늘한 말투..
나는 갑자기 다가온 이해할 수 없는 분위기에 소주를 찾아 뚜껑을 열었으며
병째 마시기 시작했다.

처녀를 잃은 여인의 반응일까 ?
사랑하지도 않는 나와 함께한 걸 후회하는 걸까 ?
점점 알 수 없었다.
속은 자꾸 타들어가고 답답한데 그녀는 아무말이 없다.
다시 소주를 입으로 가져가 크게 한모금 들이켰다.

그때였다.
갑자기 구름이 걷히며 눈부시도록 밝은 달빛이 망루안을 비춘건..
제일 처음 그녀의 머릿결에 달빛이 부딪혔으며 곧 얼굴과 손이 대리석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갑자기 그녀가 몸을 일으켜 사다리를 타고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 민정씨 ”

달빛에 드러난 그녀의 얼굴은 무척 슬퍼보였으며 처연하도록 아름다웠다.

“ 민정씨..! ”

그녀는 대답없이 땅 아래까지 내려가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고
조금씩 걸어가며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에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 민정씨~ ”

저만치 가던 그녀의 걸음이 멈춰졌다. 그리곤 뒤돌아 망루 위 날 바라보며
말했다.

“ 은혁씬 좋은 사람이예요.. 은혁씨 잘못한 것 없어요 그냥 제 문제예요
그냥..제 문제일 뿐이니까 너무 마음쓰진 말아요.. “

그녀의 목소리는 달빛을 타고 너무도 슬프게 들려왔고 이렇게 그녀를 보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 너무 마음쓰지 말아요.. ”

힘없이 한마디를 남기곤 다시 발걸음을 돌려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난 잠시 멍 해져서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무들 사이로
그녀의 모습이 가려지기 시작하자 결코 그녀를 이대로 보낼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내 삶에 처음 찾아온 사랑이었으며 아름다움 이었기에..

떠밀리듯 벌떡 일어선 나는 너무도 환한 달빛이 칸칸이 내려앉아 빛나는
사다리 첫 번째 칸에 발을 내디뎠으며

순간 <달빛에 미끄러져> 허공에서 중심을 잃었다.

미끄러져 중심을 잃고 허우적거리는 그 짧은 순간
분명히 달빛에 미끄러졌다고 느꼈던 것이다.
몸이 거꾸로 뒤집혀 손을 휘저었지만 손아귀 가득 달빛만 엉키듯
잡혀왔고 귓가에 아주 빠르게 바람 스치는 소리가 울렸으며

곧 이어 목덜미에 둔탁한 충격이 전해졌고
앞이 아득해졌다.

아득한 세상 가득 달빛만 미친 듯이 넘실거렸고..

.......................................................................................

“ 아저씨 제발요..소주 한 병만 주세요 ”

“ 아 글쎄 안된다니까 ”

“ 아니 왜요 ? 밤새 혼자 소주 없이 어떻게 있으라구... ”

“ 허 이것 참.. 자내도 알잖아?
작년 가을에 술 먹고 망루에서 떨어져 목부러져 죽은거 “

“ 아저씨도 참.. 죽을사람이나 죽지.. 하여튼 조심할께요 내 ? ”

“ 아 안돼 ! 그때 그 젊은이도 내가 판 술이었어 더 얘기하지 말고 정 먹고싶으면
다른데 가서 사오던지 하게 ..하여튼 난 못파내 “

사람 좋아뵈던 이장님이 밤에 먹으라며 컵라면두개를 주시기에
소주도 부탁하자 불같이 화를내며 거절했다.

‘ 에이..... ’

다음부턴 시내에서 미리 사와야겠다.. 생각하며 문을 밀고 나오는데
왠 할머니 한분이 가게 안으로 들어오셨다.
곁을 스치며 지나가는 할머니를 피해 옆으로 비켜서는데
지독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 .... ! ”

얼굴을 보니 두 눈이 어딘가를 보는 듯 했지만 공허했으며 딱딱한 무표정의
껍질이 주름 사이사이 깊게 새겨저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할머니는 허공을 응시하며 이장님 께 물었다.

“ 우리 손녀딸 여 안왔소 ? ”

“ 안왔어요..할머니 집에 가 계세요 저녁되면 오겠죠 ”

그러자 곧 문을열고 다시 나갔으며 느릿 느릿 걸어가셨다.
할머니가 나간 후에도 지독한 냄새는 여전했으며 이장님은 얼굴하나
찌푸리는 법 없이 문을열고 환기만 시킬 뿐이었다.

“ 어휴..왠 냄새가.. 저 할머니 누구예요 ? ”

냄새를 피해 밖으로 나와 평상에 앉으며 이장님께 물었다.

“ 누구긴 이 동내 어른이지 ”

“ 식구들이랑 안사나봐요 어휴..냄새가..”

“ 자내도 저러기 싫음 술먹지 말어.. ”

“ 네 ...? 에이.. 아저씨 술먹는거랑 무슨.... ”

“ 저 할머니 아들 내 가족이 음주운전 하다가 다 죽었다내, 저기 보이는 저쪽 차길에서..
참 세상살이 알 수 없다니.. 벌써 2년 전이지.. 아들, 며느리, 손녀
세 식구가 그렇게 죽어버릴 줄 누가 상상했겠는가.. “

“ ......... ”

“ 그 후 치매가 오셨는지..실성을 한건지..하루에도 몇 번씩 손녀딸
찾으러 오신다내.. 아주 참하고 예쁜 아이였는데..
대학 입학하고 얼마 다니지 않아서 죽었지.. 그 아이는 무슨 죄라고.. “

“ ............ ”

“ 아 그러니까 혼자 근무서면서 술먹지말고 나중에 사람들이랑 편히 마시게 ”

“ .... 네.. ”

“ 2년 전 가을엔 그 여자아이 죽고 .. 작년 가을엔 젊은이 죽고.. 이 마을서
매년 가을 젊은 사람 하나씩 죽내 허허..이것 참.. “

이장님의 얼굴에 긴 탄식이 어리더니 길게 가래침을 퇘 뱉어내곤
안으로 들어가셨다.

왠지 멋쩍어진 나도 꾸러미를 매고 산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치매 할머니.. 음주사고.. 술에취해 망루아래로 떨어져 목이 부러진..

산을 오르며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은 온통 이상 야릇한 것이어서
망루까지 다 올라와 해가 뉘엿뉘엿 저무는 것을 바라보자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이것저것 주변을 대충 살펴본 후 안나오는 소변까지 미리 보고는
망루 위로 기어 올라가 가만히 있었다.

가만히 있자니 공연히 뒷통수가 땡겨 가스에 물을 올리고 라면을 끓였으며,
커피도 이어 마시고 서둘러 담배도 피웠다.
깊은 산 해 저문 뒤 혼자 있는 시간..
지독한 고요가 이렇게 무거운 줄 미처 몰랐는데..

얼마나 웅크리고 있었을까..
깜빡 잠이 들었던 듯 하다.

사방이 컴컴하더니 달이 떳는지 사물들의 윤곽이 뚜렷이 보이기 시작했고
불안하던 마음도 조금씩 안정되기 시작했다.

약간 쌀쌀함을 느끼며 시계를 보니 새벽 두시였다.

오랜시간 웅크리고 있어 뻣뻣해진 몸을 풀어주려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다
그만 숨죽이며 멈춰서고 말았다.

태어나 처음보는 끝없는 달빛...
뭐라고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커다란 아름다움이 우주 가득 차고 넘쳐
넘실거렸고, 숲이며 봉우리들이 달빛을 받아 은빛으로 변해
아득한 꿈 속 같은 장관을 빚어내고 있었다.
그 아름다움 에 취해 쌀쌀함도 잊고 우주와 숲을 응시했다.

그때였다.

날카롭게 날이 선 고요속에 새근대는 듯하기도 하고 불규칙한 숨소리 같은
낯선 음향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간 건..
그 소리는 갑자기 허공을 가로지르며 날아가는 밤새의 소리도 아니었고
산짐승의 소리도 아니었다.
그건 분명 사람의 소리였다.
망루 아래 어딘가 풀잎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에 억눌린 듯한 숨소리가
점점 커다랗게 귓속으로 울려왔고 달빛 속에 알 수 없는 공포가 번져가기 시작했다.

‘ 뭘까...? ’

무서움과 격렬한 호기심이 뒤섞인 체 망루 창밖으로 얼굴을 내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비명처럼 소리쳤다.

“ 누구냐? ”

고요를 깨고 번져간 내 외침과 동시에 그 소음도 잠잠해졌다.
터질 듯한 호흡을 진정시키며 정말 아무것도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쥐어짜듯
다시 한 번 외쳤다.

“ 거기 누구야 ? ”

달빛을 가르며 퍼져가던 외침이 차츰 고요 속으로 가라앉을 무렵
또렷한 그리고 아찔한 음성이 수풀 아래 어둠으로부터 울려왔다.

“ 도와주세요 ”

“...... !”

“ 거기 누구 있죠? 저좀 도와주세요 ”

“ 누..누구 ? ”

“ 할머니랑 약초캐러 왔다가 길을 잃었어요 도와주세요 ”

거짓말처럼
이 깊은 산중에 달빛이 춤추는 시간, 여린 듯, 깨질듯,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 어디에 있어요? 여기 망루 보여요 ? ”

“ 네.. ”

“ 망루아래 사다리 보이죠? 올라올 수 있겠어요 ? ”

“ 네 고마워요 ”

서둘러 램프에 불을 키고 사다리 아래를 비추었다.
비로소 내 시야에 그녀가 들어왔다. 망루아래까지 와 막 사다리를 잡고 오르려하는
그녀, 언뜻 고개를 들어 불을 비추는 날 한번 올려보고 은은한 달빛을 받아
수많은 바다 물방울들처럼 반짝이는 긴 머릿결을 일렁이며 점점 내게로 가까이
올라오고 있었다.

위에서 그녀에게 램프를 비춰주는 내 손은 여전히 떨렸다.
호흡역시 가빠 숨쉬기도 힘들고,
거의 다 올라온 그녀의 숙여진 머릿결이 두렵기도 하고..
망루 위까지 다 올라와 고개를 들면 입가에 피가 묻어있을 것 같기도 하고
눈동자가 새빨갛게 이글거릴 것 같기도 하고..
그 짧은 순간 정말 많은 상상이 내 머릿속을 휘저었다.
다 올라와서 두 손을 짚고 몸을 일으킬 때 난 나도 모르게 뒷걸음쳐
그녀에게서 물러섰다. 다 올라온 그녀도 바닥에 주저앉아서 가만히 있고..

가스램프의 빛이 비추는 망루 안에 그녀와 나 꼼짝없이 가만히 있기만 했다.
그 미칠 듯 한 적막을 깨고 더듬거리며 그녀에게 말을 건냈다.

“ 저.. 어디 다친 곳은..없나요 ? ”

그러자 스르르 그녀도 고개를 들어올려 날 마주 바라보며 대답했다.

“ 네... ”

처음 우리 둘의 시선이 맞부딪혀 서로의 시선을 살폈다.
정말 다행히 눈이 빨갛지도 않았고 입가에 피가 묻었거나 칼을 물고 있지도
않은, 눈동자와 머릿결이 까맣고 선명한 아름다운 여인이
옷 여기저기는 어딘가에 긁혀 더럽혀지고 무서움과 공포, 경계의 빛을 보이며
앉아있었다.

“ 배고프죠 ? ”

귀신이면 어떤가.. 저렇게 잔뜩 겁을 집어먹은 예쁜 귀신이면..

그녀의 온몸에 달빛이 매달려 무수히 반짝이고 있었다.
눈이 시릴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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